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르겐 힌츠페터 (문단 편집) == 진실이 알려지다 == 22일 일본 [[나리타 국제공항|도쿄 나리타 국제공항]]에서 [[서독]]으로 보내진 힌츠페터의 필름은 22일 저녁 ARD가 [[서독]]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8시 뉴스 프로그램인 [[타게스샤우]]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으며, 23일 잠입해서 찍은 필름까지 보태 후속 보도도 나왔다. 그해 9월에는 《기로에 선 한국(Südkorea am Scheideweg)》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/방송되었다. 힌츠페터 일행 외의 다른 외신 기자도 많이 왔지만 힌츠페터 일행은 최초로 광주에 잠입한 외신 기자이며 현재 남아있는 컬러 영상 자료의 대부분을 촬영했기 때문에 5.18 민주화운동 취재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들이다. 또 한국에서 컬러방송이 시작된 것이 1980년 12월 1일로 5.18 광주민주화운동 약 6개월 이후라서 광주에 대해 취재한 국내 영상물의 대부분이 흑백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. [[대한뉴스]]는 컬러로 촬영되기는 했지만, 관제뉴스 특성상 광주의 상황에 대해 의도적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[[5.18 민주화운동]] 자체에 대한 영상자료로 쓰이지는 않고 당대 군부가 5.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왜곡했는지에 대한 자료로만 쓰이고 말았다. 즉, 힌츠페터 일행이 광주에 오지 않았으면 5.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벌어졌던 [[신군부]]의 시민 학살이 묻히고 축소되었으며 흑백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. 이 때문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 기자를 '항쟁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역사의 증인'이며, '계엄군', '광주시민'과 함께 항쟁을 구성하는 3개 주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